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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각나비의 완결을 기원합니다 ㅠㅠ




글이 써지지 않는다.
정말이지 한심한 일이다. 글자를 깨우치지 못한 것도 아니고, 문법에 무지한 것도 아닌데 글을 쓸 수가 없다니 말이다. 기본적인 국어수준과 쓰고자 하는 의욕만 있다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 글일 것이다. 고등교육을 정상적으로 수료한 내가 국어수준이 미달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면 쓰고자 하는 의욕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그것도 이해할 수 없다. 자발적으로 쓰기 시작한 소설이다. 누구보다도 그 결말을 원하는 것은 작가인 나일 것이다. 결국 내게는 기본적인 국어수준도, 쓰고자 하는 의욕도 충만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글이 써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창작에는 국어수준과 집필의욕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그 미지의 것을 채우기만 하면 글을 막힘없이 쓸 수 있을 것이다.” 이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약 5년 전이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백지에 글자 하나 새기기를 고달파하고 있었다. 쓸모없는 손가락을 깨물어 뜯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간 아플 테지. 손가락 대신 담배를 물었다. 담배를 처음 피운 것도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피워야지 않겠냐.”는 친구의 농담 한 마디가 원인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끊는 편이 체력이나 정신력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끊을 수 없었다. 이것이라도 물지 않으면 손가락을 물게 생겼으니 말이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산책을 하다보면 갈피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부러 소리를 내어 말해봤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갈피를 잡기 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결국 알코올로 뇌를 속이려 하는 것이다. 한 줄도 쓰지 못한 나를 망각하기 위해 술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결국 집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뭔가 다를 거야.” 아무 근거도 없는 한 마디를 신념으로 삼으며 말이다. 매일 이 모양이니까.
글이 써지지 않는다.


밤을 좋아했다. 사면을 지배하고 있는 고요와 암흑이 상쾌했다. 하지만 단순히 고요와 암흑 때문에 밤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른이 되면 수면의 강요를 받아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에서 비롯된 호의였다. 결국 나는 어른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30분가량 정신없이 걷다보니 단골술집 앞에 발이 멎었다. 오늘도 이곳에서 밤을 달래고, 집에 들어가서 시체처럼 잠들면 되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실한 오늘을 종료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머뭇거리던 내 발걸음은 결국 뒤돌아서고 말았다. 단순한 변덕이었다. 갑작스레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 그 ‘단순한 변덕’은, 내 몸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옮겼다. 버스 정류장이었다. 아직 밤이 깊지 않았기에 버스는 정상적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 보는 것도 오래간만이군.”
마침 한 대의 버스가 정류장에 몸을 세웠다. 나는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버스에 올라탔다.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 앉아 창밖의 거리를 지켜봤다. 풍경이 점차 낯설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종점까지 가볼까? 절박한 상황이 되면 나를 가엾게 여긴 무의식이, 멋진 아이디어를 내려줄지도 모른다. 종점에서 내린 다음, 그곳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것이다. 설마 그 사이에 이야기 한 두 개 정도는 떠올릴 수 있겠지.
“다음 정류장은 중목동, 중목동입니다.”
차내 방송이 멍청한 상념을 비집고 뇌리를 자극했다.
잠깐.
중목동이라고?
쉬고 있던 ‘단순한 변덕’이 다시 꿈틀거렸다.


“10년만이군.”
버스에서 내린 나는 중목동 거리를 정처 없이 거닐었다. 도시개발붐을 타고 신도시로 이사를 간 것이 꼭 10년 전이었다. 설마 고작 20분 남짓한 거리에 고향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물론 고향이라고 해봐야 친척이나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10년 만에 찾아온 그리운 풍경들은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향수를 자극했다.
편의점(예전에 슈퍼마켓이 있던 자리였다)에서 맥주 두 캔을 샀다. 그리고 발길이 이끄는 데로 몸을 움직였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고, 왁자지껄한 상점가를 지나, 병원이 있는 언덕길 고개를 올랐다. 무의식에 몸을 맡기고 있었지만, 나는 이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6년 동안이나 걸었던 길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비탈길을 한참 걷자 한 채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밤의 어둠에 물들어 있기는 했지만, 틀림없는 그곳이었다. 교문에 적힌 학교명에 눈길을 줬다.
“중목 초등학교.”
발음을 한 번 해보자 저절로 웃음이 번졌다. 모교인 ‘중목 초등학교’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언덕 위에 학교를 지었느냐고 불평하면서도, 운동신경이 좋지 않아 급우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면서도 꾸준히 다녔던 내 학교다.
학교건물은 10년 사이에 개축을 끝마친 모양이었다. 담벼락의 낙서도, 학교 뒤편의 개구멍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쩐지 입맛이 썼다. 이 학교가 이렇게 변하는 동안 나는 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교정을 한 바퀴 둘러본 후, 단상 위에 걸터앉았다. 아직 냉기를 머금고 있는 맥주캔의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들이켰다. 청량한 액체가 목을 타고 흐른다. 설마 교장선생님이 일장연설을 하던 그곳에서, 졸업생이 술판을 벌이고 있을 줄은 아무도 상상을 못했을 것이다.
한 캔을 다 비우고, 단상 위에 벌러덩 누웠다. 학교는 검은색으로 번져 있었다. 사실 이곳에 좋은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안 좋은 경험만 잔뜩 기억난다. 불량한 아이들한테 매일 놀림거리가 되고, 얻어맞고, 도시락 반찬을 빼앗기고, 기타 등등. 그래서 이곳을 졸업할 때 그렇게 다짐했던 것이 기억난다.
“나중에 훌륭한 어른이 되어서 돌아올 거야.”
훌륭한 어른이라.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나는 몸을 일으켜 비닐봉지에 남은 한 캔을 마저 꺼냈다.
“거기 누구죠?”
순간 학교가 말한 줄 알고 퍼뜩 돌아봤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학교가 아니었다. 단상에서 교정으로 이르는 계단 위쪽에, 그림자 하나가 서있었다. 어두워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누구시죠?”
다시 물어온다. 여자의 목소리다.
뭐라고 대답해야지?
“신고하겠어요!”
큰일 났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여자는 도망치려는 듯 했으나 걸음은 이쪽이 빨랐다. 나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변태야! 우리 학교에 정신이상자가!”
너무하잖아.
“그게 아니라 나는….”
어떻게든 변명을 해보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안경을 쓴 긴 머리의 여자다. 갸름한 얼굴선에 큰 눈동자, 그리고 눈 밑에 작은 점이 찍혀있는… 어라?
“송이 아냐?”
여자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리고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변태야! 우리 학교에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정신이상자가!”
갈수록 태산이었다.
“6학년 3반 오영식. 내 이름이야.”
다시 여자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좀더 세심하고 신중히 내 얼굴을 관찰했다. 이윽고 그녀는 손을 입으로 가리며,
“이럴 수가. 진짜 영식이잖아!”
비명처럼 외쳤다. 이제야 알아차려준 모양이다.
“그런데 영식이가 어쩌다가 변태가 된 거지?”
아직도 모르고 있잖아.



이송이.
나와는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소녀다. 이름 때문에 아이들로부터 ‘꽃송이(조금 얌전한 아이들)’, ‘100송이(조금 짓궂은 아이들)’, ‘몇 송이?(조금 회의적인 아이들)’ 같은 별명으로 불리곤 했지만, 워낙에 쾌활한 성격이라 뭐라고 불리던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공부도 잘하고 붙임성도 좋은 아이여서 곧잘 반장을 맡곤 했었다. 게다가 마지막 6학년 때는 전교회장 겸 학급반장까지 역임한, 한 마디로 학교의 중심에 서있던 존재였다. 교실 한 구석에서 신나게 얻어터지고 있던 나와는 정반대였다.
“놀랐네. 설마 이런 시간에 동창이랑 만난 줄은 몰랐어.”
송이는 밝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여전히 붙임성은 좋은 모양이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이렇다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정신 차려라, 오영식.
“그런데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산책을 나왔다가 우연히 모교에 들렀고, 그만 옛날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맥주 한 잔을 마셨어.” 라고 대답할 작정이었다.
“산책을 나왔다가… 나도 모르게….”
결국에는 이 모양이다. 문장이 성립되질 않는다. 하지만 송이는 충분히 알아들은 눈치였다.
“그래. 오래간만에 학교에 오면 자기도 모르게 그 정취에 휩쓸리게 마련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학교에서 술을 마시는 건 너무 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학부형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맞는 말투성이라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다. 아니, 틀린 말이라 해도 반박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 내 언어체계는 완전히 붕괴되기 직전이니까.
“만일 내가 바로 신고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미안.”
좀 더 그럴 듯한 말이 있었을 텐데. 말 지어내기를 이리도 못해서야 어디 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글이라고는 전혀 쓰고 있지 않으니 작가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도 글을 쓰지 않은 덕분에 이곳에….
“다 마셨어?”
다른 생각에 잠겨있던 탓에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그녀가 내 손에 들린 맥주캔을 눈으로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술은 다 마셨어?”
“아직 남았는데….”
“그러면 가지고 따라와.”
그리고는 뭐라고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등을 돌려 학교 안으로 들어간다.
“어디 가는 거야?”
“적어도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에서 마셔야할 것 아냐? 학교 안에서 마시는 것도 좀 그렇지만… 적어도 단상 위에서 보다는 낫겠지.”
한밤중에 학교에 들어가도 되는 걸까? 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손에 들고 있던 캔을 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옛날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녀가 사는 집이 알고 싶어서 무턱대고 뒤를 따라가 봤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아파트 단지에서 길을 잃고 날이 저문 뒤에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은 무척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송이. 그녀가 내 첫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밤의 복도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송이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작은 손전등 하나를 꺼내 자신과 내 발치를 번갈아 비춰가며 전진했다. 아무리 준비성이 좋다 해도 보통 여자가 손전등을 휴대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송이는 대체…?
“여기야.”
송이는 복도에 주기적으로 설치된 여닫이문 중 하나를 열었다. 스위치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형광등이 켜지자 넓은 공간에 빽빽이 들어선 책상, 그리고 책상 위에 널브러진 학습교재들이 보였다. 교실이 아니었다.
“교무실이잖아?”
“응, 교무실.”
“학교와 무관계자인 우리가 들어와도 되는 거야?”
송이가 권한 의자에 앉으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내 직업이 뭔지 아직 말 안했나?”
라고 반문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송이, 스물여섯 살. 현직 초등학교 교사랍니다.”
손으로 V자를 그려 보인다. 과연. 교사라면 이 시간에 학교에 있는 것도, 이런 곳에 자유로이 드나드는 것도 납득이… 아니, 잠깐만.
“선생님이라고!”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송이는 귀를 틀어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잖아? 이래 뵈도 공부 열심히 했단 말이야.”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스물여섯이면 벌써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준비할 나이다. 평균적으로 봤을 때 송이는 다른 스물여섯 살들보다 약간 빨랐을 뿐일 것이다. 그에 비해 나는 매우 느린 편이고 말이다.
“선생님이라니 대단한걸.”
“그,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냐. 올해 처음 발령 받은 신참이니까.”
송이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안경을 고쳐 쓸 때 검지와 엄지를 쓰는 버릇은 여전한 모양이다.
“그러는 영식이는 요즘 뭐해? 직장은 구했어?”
완벽하게 말문이 막혔다. 쓰고 있지도 않은 글을 쓰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글을 쓰지 않는 작가는 대체 직업이 뭐란 말인가? 결국 머뭇거리는 말투로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어.”
“그렇겠구나. 남자들은 군대다 뭐다해서 바쁠 테니까.”
송이는 그렇게 납득했다. 어쩐지 술을 마시고 싶어졌다.
“마셔도 될까?”
“응. 오늘만이야.”
나는 뚜껑을 따고 갈색액체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맛있어?”
“마셔… 볼래?”
“현직교사에게 학교에서 술을 마시라고 권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려거든 “마시고 싶어.”라고 외치는 듯한 눈빛은 짓지 말아줬으면 한다. 목구멍까지 넘어오려는 말을 술과 함께 넘겼다.
취기가 올라온다. 나는 몽롱해진 눈길로 송이를 바라봤다. 기억 속의 그녀는 아동복을 입고 있었지만, 현실의 그녀는 깔끔한 매무새의 정장을 입고 있다. 아무 사전지식이 없더라도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한 번쯤 뒤돌아봤을 것이다. 세련된 테의 안경너머로 검고 커다란 눈망울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위험하다. 이 녀석은 더 예뻐졌다.
나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술만 마시면 몸에 좋지 않아. 자, 안주.”
송이가 뭔가를 내밀었다. 검은 포장지에 싸인 사각형의 납작한 물체였다. 슈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군것질거리로, 충치와 비만의 주범인, ‘초콜릿’이다.
“웬 초콜릿이야?”
“오늘 발렌타인데이였잖아. 아이들이 준 거야.”
날짜감각이 사라진지 오래여서 오늘이 무슨 날인지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차피 공휴일도 아닌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날임에 틀림없지만.
“보통 여자가 남자에게 주는 날 아냐?”
“어린아이들한테는 성별의 의미가 희박하니까.”
납득하면서 초콜릿을 받아들었다. 맥주안주에 초콜릿은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송이가 준 것이다. 나는 포장지를 벗기고 초콜릿을 야금야금 씹었다. 의외로 괜찮은 맛이었다. 나중에 돈이 없을 때를 대비해 사둘까? 그렇게 생각하며 불현듯 눈길을 돌리자 나를 빤히 보고 있는 송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황급히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안주가 없으면 취할 테니까 준 거야. 다, 다른 의미는 없어!”
아.
그제야 눈치 챘다. 오늘은 발렌타인데이였구나.
“정말로… 큰 의미는 없어.”
평소 발렌타인데이는 초콜릿회사의 부도덕한 상술이 빚어낸 폐단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만큼은 예외다. 고맙다, 초콜릿회사.



송이는 오늘 학교에서 밤을 새워야하는 모양이었다. 이른바 ‘숙직’이라는 것이다. 원래는 경비업체에서 해주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번에 업체가 바뀌면서 일주일동안의 공백이 생겼고, 그 일주일동안 젊은 교사들이 임시로 숙직을 서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발렌타인데이에 당첨된 것이 바로 송이였다고 한다.
“나 이외의 젊은 선생님들은 전부 약속이 있었어.”
송이는 입을 비죽 내밀었다. 남자친구가 없나?
“연애는 안 해?”
맨 정신이었으면 절대 하지 못했을 텐데, 술기운 덕분인지 자연스레 말이 튀어나왔다.
“아이들이 곧잘 하곤 해, 그 질문.”
“뭐라고 대답하는데?”
“선생님은 여러분들하고 연애할 거예요!”
웃다가 술이 기관지에 들어가는 바람에 한참을 콜록대야만 했다. 한참을 웃은 뒤에야 다음 질문을 건넬 수 있었다.
“실제로는 어때?”
“실제로도 대답은 똑같아. 아이들하고 연애하는 중이지.”
나의 과도한 웃음 때문인지 송이의 목소리는 조금 새침해져 있었다.
“오늘도 할 일이 태산이야. 마침 숙직이라서 전부 끝내놓으려는 참이지.”
“무슨 일을 하는데?”
“지금은 우선 장래희망 자료를 종합하려고 했어. 아이들이 제출한 장래희망 프린트를 종합해서 컴퓨터에 저장하려고.”
말하면서 송이는 책상 가장자리에 놓여있던 종이다발을 보여줬다. 거기에는 삐뚤빼뚤한 글씨와 다소 산만한 그림으로 아이들의 장래희망이 표현되어 있었다. 달리기 선수, 컴퓨터 박사, 해적왕…. 훑어보니 의외로 현실적인 것도 있었고, 예상을 훨씬 초월할 정도로 추상적인 것도 있었다.
장래희망이라. 대체 뭐라고 썼더라?
“작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혼잣말을 꺼낼 속셈이었는데 송이가 슬쩍 들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냐며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다시 맥주캔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캔은 가벼웠다. 벌써 다 마신 모양이다.
“다 마셨어?”
게다가 송이도 그것을 눈치 챈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병… 아니, 피쳐를 사왔을 텐데. 지금 사러 갔다 오는 것은 역시 무리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꽤나 묘한 상황이었다. 아무도 없는 학교에 단 둘이 있는 셈이니까. 게다가 남자 쪽은 술에 취한 상태다. 만일 내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송이는 나를 남자로 보지 않는 것인가?
“이만 갈게.”
“버, 벌써 가려고?”
‘벌써’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은데.
“일하는데 방해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송이는 뭔가 더 말하려고 하는 눈치였지만, 곧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교문까지 바래다줄게.”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복도는 어둡다고. 내 손전등이 없으면 힘들걸?”
송이는 손전등을 꺼내들었다. 확실히 손전등의 유무는 어둠 속에서 큰 차이가 난다. 나는 순순히 그녀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송이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도 그 뒤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복도로 나섰다.
복도에는 어둠이 자리해 있었다.


우리는 복도로 나섰다.
복도에는 어둠이 자리해 있었다. 평범한 밤의 어둠이 아니었다. 밤보다 훨씬 시커멓고 소리 없는 암흑이었다. 마치 복도 정체에 검정안개가 가득 드리워져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등골을 타고 한기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하는데 발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한 발을 더 디뎠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악몽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이상한 분위기네.”
송이도 위화감을 느꼈는지 살짝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정말 우리 학교 맞아?”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말문이 막혀 있었다.
갑작스레 변한 어둠을 관찰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중, 움직이는 존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복도의 끝에 서있었다. 눈동자는 사람의 그림자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중추신경 어디에선가 저것은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사방이 온통 시커먼 가운데에서도 오로지 그 그림자만이 두드러지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 실은 오직 그 그림자만이 검은 것일지도 몰랐다.
“누, 누가 있어!”
송이도 그 그림자를 본 모양이다. 그녀의 눈빛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어깨라도 잡아주고 싶었지만 무리였다. 누군가를 격려하기에는 내 몸이 지나치게 떨리고 있었다. 다만 두려움을 삼키며 복도 끝의 그림자를 바라볼 밖에 도리가 없었다.
“움직였어!”
속삭이는 목소리로 비명처럼 말했다. 송이의 말대로 그림자는 움직이고 있었다. 그나마 인간처럼 ‘걷고’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머릿속에서는 필사적으로 외쳐야할 말들을 조립하고 있었는데, 그 말들은 목구멍을 넘어오지 못하고 족족 해체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림자는 천천히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세요?”
한심하게도 말을 꺼낸 것은 내가 아니라 송이였다. 그림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 다가오면 신고하겠어요!”
송이가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그녀의 행동에 반응했는지 그림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의 여운을 보낸 후, ‘말했다.’
“전화인가?”
그리운 목소리다. 처음 듣는 것이 분명한데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시한 물건이다. 다음부터는 편지를 쓰도록.”
창가에 스며드는 달빛 덕분에, 그림자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얀 경질의 가면 위로 한 획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마치 한 줄기의 벼락을 형상화한 듯한 ζ라는 글자. 나는 그것이 로마 알파벳의 여섯 번째 글자인 ‘제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편지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고상한 의사소통 수단이니까.”
그림자가 시대착오적인 소리를 내는 가운데에도, 송이는 필사적으로 핸드폰의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어쩐지 헛수고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이곳에서는 전파는 고사하고, 숨소리 하나 빠져나가지 못할 듯한 분위기였다.
“신호가 가지 않아….”
망연한 목소리로 송이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림자가 낮게 웃었다.
“요사스러운 밤으로부터는 누구도 도망칠 수 없다.”
요사스러운 밤. 그야말로 지금을 완전무결하게 표현해주는 말이었다.
“원망하려거든 이 밤을 불러일으킨 저 남자를 원망하도록.”
가면 아래 감춰져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림자의 눈동자가 느껴졌다. 증오와 원념으로 가득 찬 그 눈길이 전신을 뚫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오영식.”



그림자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 사실만으로도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듯 했다. 너는 누구지? 묻고 싶었지만 말라붙은 목청은 아무 소리도 내주지 않았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나를 대신해 송이가 입을 열어줬다. 그림자는 그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에 서있는 남자가 알고 있다.”
송이는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 기억이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잊어버린 모양이군. 그 때문에 이 요사스러운 밤이 열린 것이다.”
다시 그림자가 웃는다. 끔찍한 소리였다.
“너는… 누구냐!”
간신히 목소리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자 그림자의 웃음이 멎었다.
“‘장래야차’라는 존재에 대해 알고 있나?”
역시 기억은 침묵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는 누구나 꿈을 꾸게 마련이다. 소위 ‘장래희망’이라고 하는 것이지. 하지만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어른으로 자라면서 그 장래희망을 망각해 버린다. 한때는 그 아이의 모든 것이었을 그 꿈이 망각이라는 괴물의 발톱 아래 짓이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장래희망은 그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지. 아이가 자신을 희생해서 또 다른 꿈을 이뤄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말이다.”
교무실에서 봤던 장래희망 프린트가 떠올랐다. 고작 몇 분전의 일이었는데도 아득한 옛날의 경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렇게 장래희망의 희생으로 충분한 힘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열정과 능력을 낭비하는 나약한 존재들이 있다. 너처럼 말이다. 그런 이들의 장래희망은 요사스러운 밤이 되면 야차가 되어 자신을 망각했던 자에게 복수하러 온다. 그 복수의 형상들을 일컫는 이름이 바로.”
그림자는 연극배우처럼 인사해왔다.
“장래야차라고 한다.”
땀이 흘렀다. 복도를 지배하고 있는 한기만큼이나 차가운 땀이었다.
“꿈이지, 이거?”
송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온다. 하지만 나를 대신해 그림자가 대답한다.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아가씨. 본디 저 남자를 단죄하는 자리이지만, 아가씨 또한 이 연극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마지막까지 동석해주기 바란다.”
송이는 귀를 틀어막고 “꿈이 분명해.”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기 시작했다. 나는 호흡을 몇 차례 가다듬은 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거냐?”
그림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웃음을 섞어 목소리를 냈다.
“이 학교는 4층이다.”
음산하면서도, 어딘지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였다.
“각 층마다 네가 꿔왔던 장래희망들이 야차가 되어 너를 노리고 있다. 네가 그들을 죽이면 다음 층으로 갈 권리를 얻게 된다. 모든 야차를 죽이면 마침내는 이 밤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들이 널 죽이면, 인생을 낭비하는 너를 대신해, 그들이 너의 현실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그들을 망각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망각당할 것인가? 선택은 너에게 달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도대체….”

“믿고 싶지 않다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라. 그것이야말로 가장 너다운 모습이니까.”
이가 악물렸다.
“하지만 주저앉지 않겠다면 이것을 주마. 야차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무기다.”
그림자가 뭔가를 던졌다. 바닥에 굴러 떨어진 길쭉한 물체는… 연필?
“옥상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그림자가 흐려졌다. 나는 연필을 주워들며 그에게 외쳤다.
“잠깐 기다려, 장래… 야차!”
“그렇게 부르면 다른 야차들과는 구별이 되지 않는군. 그러니 이제부터는.”
가면에 새겨진 ζ문양을 만지작거리며, 그림자는 말했다.
“‘6학년’이라고 불러라.”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믿을 수 없어.”
송이는 벽에 몸을 기대며 그렇게 말했다. 나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6학년’이 사라진 이후, 나와 송이는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란 문은 모조리 조사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열리는 문이 없었다. 자물쇠가 잠겨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마치 문으로써의 가치를 모조리 상실해버린 것 같았다. 창 밖의 풍경 또한 기괴하게 변해 있었다. 달은 1분단위로 차고 이지러지기를 반복했고, 거리에는 온통 황량한 어둠만이 가득 차 있었다.
“요사스러운 밤.”
6학년이 저주처럼 읊던 그 말을 입에 담아봤다.
“탈출하기 위해서는 그 녀석을 죽여야 하는 것인가.”
“악몽도 이런 악몽은 없을 거야.”
송이는 한 손으로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게다가 아무리 봐도 내 악몽이 아니라 네 악몽인데, 왜 나까지 이 고생을 해야 하는 거야?”
나 또한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설령 장래야차란 존재가 실재하고, 그가 나에게 복수를 하려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해도, 어째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송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인가? 그녀는 단순히 10년 만에 만난 동창일 뿐인데 말이다.
“아무튼 다시 그 6학년이란 녀석을 만나서, 나가게 해달라고 호통을 치면 된다는 거지?”
의외로 송이는 순순히 상황에 적응한 눈치였다. 무섭지도 않나?
“꿈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잖아. 그리고 어차피 꿈이라면 이기는 꿈을 꾸고 싶어.”
안경을 고쳐 쓰며 그렇게 말한다. 정말이지 대단한 여자였다. 나도 절반만 그 정신을 닮을 수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일단 옥상에 가보자.”
송이는 낙심하고 있는 나를 잡아끌었다. 계단이 있던 곳에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부터가 진짜 문제였다. 본래 계단이 있어야할 곳에는 커다란 철문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나보다 송이가 더 당황한 눈치였다.
“이런 문은 없었는데.”
그러고 보면 6학년은 이런 말을 했었다. 각 층마다 장래야차가 있고, 그들을 죽여야만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였다. 지금 1층에 있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답이다.”
갑작스레 뻗어 나온 목소리에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우리의 바로 뒤에 서있었다. 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6학년조차 약간은 사람의 기척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그림자에게서는 아무 것도 감지되질 않는다.
“누구…세요?”
송이가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림자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것만으로도 공기가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정확히는 얼굴을 덮고 있는 가면을 봤다. 가면에 새겨진 글자는 α. 로마 알파벳의 첫 번째 글자인 알파다.
“‘1학년’이다.”
낮은 목소리로, 그림자는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유심히 1학년을 살펴봤다. 가면 뒤로 아무렇게나 기른 머리카락이 풍성했다. 망토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딱 벌어진 어깨와 강인한 목선으로 미루어볼 때 얼마나 건장한 체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기억나나, 오영식?”
1학년이 물어온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네가 누구인지?”
대답할 수 없었다. 기억은 여전히 녹슨 채로 작동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완벽히 잊어버린 주제에… 내 꿈을 이뤄주지 못한 주제에… 이처럼 인생을 낭비하고 있단 말인가?”
1학년이 다시 움직였다. 명백한 적의가 담긴 걸음걸이였다. 나는 송이에게 피하라고 외치려 했다. 하지만 말 대신 신음이 뱉어져 나왔다. 시선을 내려보니 1학년의 코트 속에서 뻗어 나온 주먹이 복부에 박혀 있었다.
“그렇다면 기억나게 해주마.”
몸이 붕 떠오르더니 시야가 급격히 반전했다. 이윽고 강렬한 통증과 함께 나는 복도에 볼품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조금 전의 지르기로 어림잡아 10미터는 날아온 듯 하다.
“영식아!”
송이의 목소리가 여러 겹으로 겹쳐서 들린다. 복부에서 뻗어 나온 충격이 청각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학창시절 그렇게 많이 맞아봤지만 이 정도로 강한 살의가 담긴 주먹은 처음이었다.
고개를 들어 1학년의 모습을 살펴본다. 그는 이미 코트를 벗은 뒤였다. 그의 복장을 보고서야 나의 기억에 반응이 돌아왔다. 남루한 도복과 검은색 허리띠가 아련한 기억을 두들겨 깨웠다.
“기억났어.”
기침과 함께 목소리를 뱉었다.
“너는 내 1학년 때의 장래희망이었던….”
당시 나는 약한 육체와 부족한 운동신경을 보충하기 위해 합기도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다녀도 강해지지 못했다. 오히려 주먹을 알게 되면 알게 될 수록 쓰기가 무서워졌다. 나는 합기도를 배우기 전보다 더 많이 맞았고, 더 많이 굴복했다. 그래서 나는 내심 바라고 있었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내지를 수 있는, 그 누구보다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가 되기를.
내 1학년 때의 장래희망.
“‘무도가’인가.”
1학년은 웃고 있었다. 가면 뒤에 흐르는 그의 미소가 느껴졌다.
“황당한 꿈이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너보다는 가치 있는 꿈이다.”
1학년이 다시 움직였다. 순식간에 간격이 좁혀졌다.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그의 움직임에 비하면 나무늘보나 다름없었다. 신음을 낼 여유도 없이 1학년의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이번엔 발차기다!
“커…헉.”
그의 발뒤꿈치가 내 명치를 가격했다. 순간적으로 호흡이 정지했다. 동시에 정수리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모든 기관이 비명을 질렀다. 다시 한 번 시야가 반전되고, 내 몸은 뒤로 날아가 복도 끝에 처박혀 버렸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다. 살아난 것만 해도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저런 녀석과 싸워 이기라니, 농담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만해요!”
몽롱해지려는 의식 속에 한 기 목소리가 나타났다. 나는 마지막 기력을 짜내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가 1학년의 앞을 막고 있었다. 저것은… 송이?
“비켜라. 무도가는 여자에게는 손을 대지 않아.”
“뭐가 무도가야!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때리는 것이 무도인가요!”
그만해. 저 녀석을 자극했다가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우습군.”
1학년은 변함없는 음조로 말했다.
“네 눈에는 저 녀석이 나보다 약해 보이는 것인가? 한때 나라는 장래희망을 무참히 짓밟고 그 시체 위에 우뚝 섰던 저 남자가 말인가? 그것만으로 저 녀석의 죄는 명백하다. 녀석은 자신이 죽인 꿈들에 대해 속죄해야만 한다. 그 꿈들보다 나약해진 대가를 치러야한단 말이다!”
말을 마친 1학년의 손이 올라갔다. 저 녀석, 송이에게 주먹질을 할 셈인가!
“그만둬!”
이렇게 큰 소리를 내본 것은 몇 년 만일까? 아직도 명치에서는 통증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은 더 이상 움직이고 싶지 않다고 흐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일어섰다.
“비켜, 송이야….”
“하지만….”
“부탁이야.”
송이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에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1학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전히 엄청난 위압감이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백이 증발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송이를 봤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어디 한 번 해보자.”
나는 자세를 취했다. 1학년 때 배웠던 그 합기도의 자세였다. 가물거리는 기억을 필사적으로 가다듬으며 단전에 힘을 집어넣었다.
“호오.”
1학년은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나의 모습을 관찰하더니,
“그렇다면 나도 진심으로 일격을 가해보지.”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그는 한껏 시위를 당긴 활이었다. 시위에서 화살이 떠나는 순간, 내 육신은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나로서는 그 일격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자.”
말이 끝남과 동시에 1학년이 움직였다.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내 동체시력으로 그의 모습을 따라잡는 것은 무리다. 나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1학년의 지르기가 내 심장을 노리고 달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피할 수 없는 일격이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심장 앞에 서있는 주먹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주먹과 동일한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몸이 한 바퀴, 회전했다.
눈을 뜨자 1학년의 등이 보였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것으로 그의 목덜미를 내리찍었다. 1학년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다만 감전이라도 된 듯 고개를 천장을 향해 빠짝 쳐들었을 뿐이었다.
“또 졌군.”
한참 후에야 1학년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것이 지금 네가 꾸고 있는 장래희망인가?”
목덜미에 박힌 연필을 만지며, 1학년이 말했다.
“가느다랗고 볼품없군. 하지만 내 숨통을 끊어놓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그는 연필을 뽑아들었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다만 공허한 암흑만이 구멍에 담겨 있었다. 1학년은 나에게 연필을 돌려줬다. 그리고 말했다.
“문은 열릴 것이다. 2층으로 올라가라.”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여전히 피는 흐르고 있지 않았다. 다만 어째서인지 내 눈가에서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굴을 보여줘.”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1학년은 조용히 가면을 벗고는, 나를 향해 절반만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강인한 정신과 육신의 소유자가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잊어버려라. 어차피 덧없는 꿈이었다.”
“잊지 않겠어.”
1학년은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그라져 갔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뭔가가 달려들었다. 상처투성이의 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피할 기력 따위는 없었다. 기력이 있었다고 해도 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송이가 나를 껴안은 것이다.
“괜찮아? 응? 정말 괜찮은 거야?”
송이의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다시금 찾아온 통증 때문에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다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바보 같아! 무도가가 뭐야, 무도가가!”
“괜찮은 장래희망 아니었나?”
“전혀 안 괜찮아!”
나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고 있다. 뭐가 그렇게 슬픈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말이다.


송이가 양호실에서 가져온 붕대와 소독약으로 대강의 응급처치를 끝낼 수 있었다. 1학년이 일부러 봐준 것일지도 모르지만, 심각한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천만다행이다. 만일 이런데서 치명상을 입었다가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
붕대로 상처를 대충 감은 뒤, 2층으로 향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기다려봐.”
송이가 나를 불러 세웠다.
“1층에서는 1학년이 등장했으니까, 2층에서는 2학년이 등장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겠지.
“2학년 때 네 장래희망이 뭐였는지 알면 미리 작전을 짜둘 수 있잖아. 2학년 때 꿈이 뭐였어?”
기억을 독촉해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송이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런 것도 기억 못할 수 있지? 나는 전부 기억한단 말이야!”
“그래? 그럼 1학년 때 장래희망이 뭐였는데?”
“선생님.”
“2학년 때는?”
“선생님.”
“…3학년 때도?”
“응, 선생님.”
이런 녀석에게는 장래야차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줄곧 한 가지 꿈만을 응시하고 그것을 이룩해낸, 이런 강한 아가씨한테는 말이다.
“뭐야, 무시하는 거야? 선생님이 얼마나 좋은 직업인데!”
송이는 내 이마를 살짝 쥐어박았다. 1학년의 주먹만큼이나 매서운 일격이었다.
“아무튼 2층으로 올라가 보자고. 아무래도 본인의 얼굴을 보기 전에는 기억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이마를 문지르며 다시 일어서려 하자 송이가 내 옷자락을 잡았다.
“조심해야 돼.”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껴안아버리고 싶다고 느끼는 나는 구제할 수 없는 변태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계단을 막고 있던 철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우리는 시선을 위로 두며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2층 복도 역시 1층과 별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올라서자마자 복도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는 그림자가 보였다는 것 정도일까?
“잘 왔어, 나의 더블워커.”
가면의 남자는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한눈에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은 자기주장이 말도 안 되게 강한 녀석이다.
“정체를 밝히세요, 이 악당.”
송이의 씩씩한 말이었지만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가면의 남자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달빛이 비춰지는 곳으로 스스로 몸을 옮겼다. 종아리 까지 내려오는 긴 소매의 옷을 입은 남자였다. 얼굴에는 여전히 가면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거기에 새겨진 글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이었다. β. 베타, 로마 알파벳 두 번째 글자다.
“‘2학년’이라고 해, 아가씨. 멋대가리 없는 이름이라고 본인도 생각하는 중이야.”
자조적인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영식’이라고 불러도 좋아. 이쪽도 멋은 없지만 그나마 사람다운 이름이니까.”
“영식이는 여기 있어요!”
송이가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만일 연극이었다면 부끄러워서 제대로 연기를 진행하지 못했을 상황이다.
“걱정하지 마, 아가씨.”
2학년은 소매를 펄럭이며 말했다.
“이제부터 그 이름은 내 것이니까.”
그리고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한 차례 바람이 불었다. 자연이 만들어낸 바람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예리하고 매서운, 칼바람이었다.
“인사치레였다.”
2학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눈앞에 있었는데.
“아가씨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말이야. 뺨을 살짝 만지는 정도로 끝냈어.”
화끈거리는 뺨을 만져봤다. 끈적거리는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다. 어둠 속에서도 그 액체가 붉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식아!”
“아가씨는 피해있어. 내 바람은 아프니까.”
다시 2학년의 소매가 펄럭거렸다.
“이번에는 목덜미를 만져주겠어.”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대로라면 진짜 죽는다. 나는 재빨리 송이를 껴안고 교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간발의 차이로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바람이 지난 자리를 불꽃이 선을 이루며 따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속력이다.
“역시 좁아터진 이곳에서는 제어가 잘 안되는군.”
교실 바깥에서 2학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송이에게 숨어있으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같이 싸우겠어!”
이 아가씨는 저런 괴물과 싸울 작정이다. 용감한 것인지, 무식한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작전회의는 아직 안 끝났어? 내가 안으로 들어갈까?”
창가에 2학년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너, ‘비행사’로군.”
나는 숨을 몇 차례 가쁘게 몰아쉰 뒤 말했다. 그러자 2학년의 한결 쾌활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맞췄어. 하지만 평범한 비행사들과는 달라. 그들은 비행기나 우주선 따위를 이용해 하늘을 날고자 했지만, 너는 그런 복잡한 것을 원치 않았어. 다만 너의 힘으로, 너 자신이 날고 싶어 했지. 대체 이런 멋진 꿈을 왜 포기한 거야?”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었거든.”
“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지. 결국 너는 다른 꿈을 위한다는 명목아래 나를 이 어두컴컴한 밤 속에 가둔 거야. 날개를 펼치기도 힘든 이 좁아터진 곳에 말이다!”
쨍강.
교실 유리창 한 장이 깨졌다. 송이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나오지 않으면 교실 안에서 날갯짓을 하겠어. 그렇게 되면 아가씨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자락을 붙잡는 송이에게 웃어 보이기까지 하며 말이다.
“작전이 있어.”
하지만 나에게는 웃을 여유도, 이 상황을 역전시킬만한 작전도 없었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6학년에게 받은 길쭉한 연필 한 자루뿐이다. 대체 이런 것으로 어떻게 저 음속에 버금가는 괴조를 이기란 말인가?
심란한 마음을 뒤로 한 채 교실을 나섰다. 복도에는 2학년이 처음 봤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서있었다.
“잘 생각했어. 아가씨를 다치게 하는 것은 나도 원치 않는 바야.”
놈의 소매가 다시 펄럭인다.
“특별히 최고속력을 내줄게.”
흐느적대던 소매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이윽고 2학년의 양팔은 검고 길쭉한 칼날 모양으로 변했다. 저런 것이 음속의 영역으로 달려든단 말인가? 연필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연필이 예상외로 강하다는 것은 1학년을 쓰러트릴 때 확인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자루는 너무했다. 한 다스 정도만 있었어도 어떻게 해볼 텐데.
응? 한 다스?
머릿속에 뭔가가 번뜩 떠올랐다.
“그럼 이륙하겠습니다. 안전벨트는 없으니까 얌전히 죽으세요.”
2학년이 허리를 숙였다. 이윽고 그는 점에서 무한히 빠른 선으로 변해 나를 향해 뻗어왔다. 눈을 한 번 감으면 끝이다. 그것으로 내 몸은 뚫리고 말 것이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나는 연필을 부여잡고 옆에 있는 것을 내리쳤다.
쨍그랑.
유리창이 깨졌다. 깨진 유리조각들은 파편이 되어 복도에 분산되었다. 돌진해오는 2학년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 또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인식보다도 더 빠른 그의 비행이, 그를 유리 칼날들의 한복판으로 인도했다.
다음 순간 한 마리의 새가 복도 끝에 추락했다.


“멋대가리 없군.”
2학년은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몸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몸에 박힌 유리조각들이 달빛에 반사되어 기묘한 색채를 뿜고 있었다.
“제법 쓸만한걸, 그 길쭉한 것.”
2학년은 턱 끝으로 내가 쥐고 있는 연필을 가리켰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하늘… 날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만이 가득했지만 그의 눈에는 어둠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의 가면을 벗겼다. 그 안에는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내가 있었다.
“나는 잊어버려도 상관없지만, 하늘은 잊지는 마라.”
그가 잊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나니까.
“정말이지 멋대가리 없는 놈이군.”
2학년은 내 손에서 가면을 빼앗아 자신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 가면 뒤의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잇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반짝이는 유리조각들 속에서 2학년은 어둠에 녹아들어 갔다.
“대단해, 영식아!”
송이가 팔짝팔짝 뛰며 내게 다가왔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어?”
“운이 좋았지.”
물론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라는 수식어를 생략한 문장이었다.
“많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녀의 말대로 1층에서 받은 만큼 타격이 크지는 않았다. 상처도 뺨에 난 한 줄기 바람자국 정도가 고작이었다. 내가 손으로 뺨을 닦으려 하자 송이가 손등을 때렸다.
“덧나.”
그리고는 자기 손수건으로 뺨을 닦아줬다. 손수건 뒤로 느껴지는 그녀의 손가락이 기분 좋았다. 아니, 안 좋았다. 또 한 번 이대로 껴안아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다.
“3학년 때는 어때?”
내 뺨을 닦으며 그녀가 물어왔다.
“장래희망이 뭐였는지 기억나?”
나는 기억을 가다듬어 봤다. 1학년이나 2학년 때와는 달리 3학년 때에는 다소 기억이 분명한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면 송이와의 첫 만남이라든가.
“그러고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난 게 3학년 때였나?”
사실 그다지 행복한 추억은 아니었다. 나는 상념에 잠긴 채 허공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고, 송이는 떨어트린 안경을 줍기 위해 발치를 보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부딪혔는데, 문제는 그 날 송이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그 날 그녀의 속옷을 무삭제로 감상할 기회를 얻었다.
“사실 보여줘서 별로 부끄러울 것도 없었는데.”
지금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지만, 당시의 송이는 아래층까지 소리가 들릴 정도로 큰 비명을 질렀다. 당황한 나는 도망쳐 버렸고 말이다.
“미안했어.”
하지만 송이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었잖아. 책임은 반반이지. 물론 너도 나한테 속옷을 보여줘야 진짜 비기는 것이지만…”
말을 하다말고 송이는 입을 막았다. 자신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발언을 했는지 그제야 눈치 챈 모양이다. 침묵이 거북하다.
“자, 장래희망이 뭐였는지 생각이 잘 안나.”
꽤나 고민해서 낸 말이었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송이도 “올라가 보면 알겠지.”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역시 무덤까지 가져가야겠다.
그때 그녀의 속옷색깔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3층에 오르자마자 우리를 반겨준 것은 하나의 선율이었다. 건조함 속에서도 숨길 수 없는 우수를 간직하고 있는 소리였다.
“피아노….”
건반소리가 가녀린 곡조로 울고 있었다.
“무슨 곡일까?”
“『짐노페티』라는 곡이야.”
그렇게 대답하자 송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봤다.
“보기보다 박식하네, 우리 영식이.”
박식해서 안 것이 아니다. 내가 아주 좋아했고, 연주하고 싶어 했던 곡이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을 뿐이다. 3층에 있는 장래야차는 아마도….
우리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송이는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망설였지만 나는 그녀를 달래며 음악실의 문을 열었다. 여기에 있는 장래야차가 정말로 ‘그 녀석’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연주는 멈추지 않았다. 연주자는 역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의 정중앙에 그려진 문자는 γ, 감마였다.
“오셨군요.”
곡이 끝난 다음에야 그는 우리에게 인사했다.
“‘3학년’입니다. 그쪽에 앉으시죠.”
“설마 영식이의 3학년 때 꿈이…?”
“네. ‘피아니스트’였답니다.”
“너무 안 어울려!”
송이는 입을 틀어막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3학년, 피아니스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웃음이 지나치네요. 이래 뵈도 그 시절에는 열심히 피아노 연습을 했답니다.”
“그랬지.”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야 분명히 기억이 난다. 나는 분명히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이유란 단순히….
“한 곡 연주해드리죠, 웃음이 지나친 아가씨. 원하는 곡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러자 송이는 웃음을 멈추고 퍼뜩 놀라하며,
“우리 영식이랑 싸워야하는 것 아닌가요?”
하고 반문했다. 이 아가씨는 이제 나를 전투기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3학년은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아니스트는 싸우지 않아요. 연주를 할 뿐이죠.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곡을 신청해 주십시오.”
그는 다시 피아노의자에 앉았다. 송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다, 결국 두 손을 들었다.
“미안해요. 피아노곡은 잘 몰라요. 영식이라면 잘 알 테니 그쪽에게 부탁하세요.”
그러자 3학년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능글맞은 녀석 같으니라고. 내가 뭘 신청할지 뻔히 아는 주제에.
“『Je Te Veux』도 연주할 수 있나?”
“물론이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랍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니까 말이다.
“이 가면은 연주에 방해되는군요.”
연주를 시작하기 전, 3학년은 스스로 가면을 벗어버렸다. 약간 말랐지만 눈빛만큼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는 청년이 등장했다. 도무지 나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에 찬 청년이었다. 심지어 송이조차 넋을 잃고 “영식이도 다음부터는 저런 스타일로 꾸며봐.”라고 할 정도였다. 시끄럽다.
“시작하겠습니다.”
열 개의 손가락이 밤에 홀린 듯한 춤을 춰댔다.


박수를 건네야 하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연주를 끝내고 황홀경에 사로잡힌 사내를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20년 동안 이 어둠 속에 갇혀서 이 곡을 연습해왔을 것이다. 나에 대한 증오와 원망도 모조리 잊은 채, 오로지 곡을 완성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말이다.
“대단해….”
송이의 박수소리가 들렸다.
“정말 대단해요! 나, 조금 울어버렸어요.”
그러자 3학년은 고개를 돌렸다. 땀이 얼굴에 한가득했지만, 너무나 행복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멋진 연주였어, 3학년.”
내가 조심스레 말하자 3학년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3학년은 너무 삭막한 이름이에요. 저도 기왕이면 다른 이름이 갖고 싶었답니다. 이를 테면 ‘오영식’이라든가. 하지만 당신은 꿈을 포기하고 말았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빛에 비난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피아노 선생님한테 ‘재주가 없다.’는 꾸지람을 들은 정도로 포기해버리다니, 너무 의지가 얕으신 것 아닙니까?”
“미안해.”
솔직한 심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피아니스트는 빙그레 웃었다.
“혹시 기억나십니까? 피아노 학원에서 선생님이 들려줬던 무서운 이야기 말입니다…. 연습을 게을리 하던 한 소년이 멍하니 건반에 손을 올리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피아노가 살아나 뚜껑을 닫아버려서, 결국 그 소년은 손가락을 잃고 말았다지요.”
“정말 황당한 이야기였지. 그런데 그게 어찌나 무섭던지.”
“어디 한 번 시험해 보겠습니다.”
무슨 소리지?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피아노가 살아났다. 그 괴물은 맹렬한 기세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고막을 찢을 듯한 불협화음이 음악실 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연주자는 손가락을 잃고 말았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고함을 치며 그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괜찮습니다. 저는 이제 소원을 이뤘으니까요.”
피아니스트는 내 어깨너머로 울먹이고 있는 송이의 얼굴을 봤다.
“당신의 꿈은 분명히 ‘피아니스트’였지만 보통 피아니스트가 아니었죠. 첫사랑의 소녀에게 좋아하는 곡을 들려주고 싶다는 수줍은 열망을 가진 피아니스트….”
너무나 작은 목소리여서 송이에게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들었다. 어린 시절 나의 꿈이 이뤄지는 소리였다.
“제 꿈은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그 손가락으로 당신의 꿈을 이루세요.”
말을 마친 피아니스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완성된 연주자는, 선율과 함께 밤하늘로 돌아가 버렸다.


송이는 한참을 울었다.
“그래도 행복한 얼굴이었어.”
그녀가 간신히 진정된 다음에 꺼낸 첫 마디였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3학년 때의 영식이는 굉장히 감성적인 아이였나 봐.”
그도 그럴 것이다. 처음으로 이성에게 호의를 가졌을 때니까.
“4학년 때는 어땠을까?”
기억나 버렸다. 내 6년 동안의 초등학교 생활 중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를 꼽으라면 바로 4학년과 5학년 때였다. 송이와는 층이 다른 교실로 배정을 받았고, 아이들의 괴롭힘이 가장 극에 달해 있었으며, 그나마 내세울 수 있던 유일한 장점이었던 성적도 곤두박질치던 시기였다. 당시의 나는 학교 전체가 ‘싫어하는 것’들의 총체로 인식했었다. 6학년 때 송이가 같은 반이 될 때까지 말이다.
그 때 내가 무슨 장래희망을 가지고 있었더라? 정말로 터무니없었던 것 같긴 한데.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4학년과 5학년 때에는 같은 장래희망을 썼던 것 같아.”
결국 간신히 기억해낸 것은 그것뿐이었다.
“잘됐네. 그럼 한꺼번에 물리치고 옥상에 갈 수 있을 거야!”
남의 속도 모르고 송이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긍정적인 사고는 확실히 본받을 만 했다. 어차피 고민해봤자 대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 온 이상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손가락으로 당신의 꿈을 이루세요.”
알았어, 연주자.
나는 일부러 힘찬 걸음을 하며 4층에 올랐다. 송이도 내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4층에 발을 내딛자,
“환영하네, 젊은이들.”
복도 끝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중후한 음성이었다. 나와 송이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동시에 그 음성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복도의 맨 끝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지금까지의 야차들과 마찬가지로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거기에 새겨진 것은 한 글자가 아닌, 두 글자였다. δ과 ε, 델타와 입실론이다.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중년신사라는 느낌이었다.
“영식아, 혹시 네 장래희망이… 샐러리맨이었니?”
그것만큼은 확실히 아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양복을 입은 남자는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나는 손에 쥔 연필에 힘을 넣으며 대꾸했다.
“뭐라고 불러야 하지? ‘4, 5학년’이라고 하면 되나?”
그러자 양복의 남자는 가면을 긁으며 말했다.
“너무 운치가 없군. 직업을 가르쳐 줄 테니 그렇게 불러주게.”
남자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대통령’이라고 하네.”


기억나 버렸다.
4, 5학년 시절이었다. 고통과 앙심이 정점에 달해있던 당시의 나는, 나를 괴롭히는 총체적인 모든 것들을 지배할 강력한 힘을 원했다. 그 굴절된 희망의 발로가 지금 바로 눈앞에 서있는 저 남자였다.
“사실 나는 자네의 고통을 바라지 않지만.”
대통령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일일세. 이해해 주게.”
지금 이 상황의 어디가 나라와 국민을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대통령이 손바닥을 정면에 펼쳤다. 그러자 그의 등 뒤에서 뭔가가 날아왔다. 길쭉한 원통형의 그 물체는… 미사일이다!
“말도 안돼….”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송이를 데리고 교실로 튀어들었다. 우리가 서있던 자리는 이미 폭염에 휩싸인 채였다.
“이해해 달라고 하지 않았나? 얌전히 죽어주게.”
교실 안으로 대통령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 길쭉한 물체가 여럿 등장했다. 이번에는 소총이다. 여섯 정의 소총은 공중에 뜬 채로 자동 장전되었다. 이런 기술력이 군에 도입되었더라면 군대도 없어졌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할 틈 따위는 없었다.
“총살.”
대통령의 목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소총들이 불을 뿜어댔다. 발사가 끝날 때까지 한 발도 맞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요행이었다. 나와 송이는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른 채 일단 복도로 다시 뛰쳐나갔다.
“영식아!”
송이가 울부짖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이것은 좀 너무하지 않아?”
“아이들에게 있어서 대통령은 ‘왕’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라네, 아가씨.”
대답을 한 것은 내가 아닌 대통령이었다. 그는 어느 틈엔가 우리의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순간이동도 할 수 있는 것인가?
“게다가 이 청년은 비할 데 없이 강하고 악랄한 왕을 원했다네. 바로 나처럼 말이야.”
대통령의 주먹이 복부를 가격했다. 복도가 천장이 되더니, 의식이 하얗게 물들어 갔다. 이 엄청난 이동속도와 살상력 높은 주먹은 분명 이전에 경험한 적이 있었다. 1학년과 2학년.
“나는 나라 그 자체라네. 다른 국민이 쓰는 능력들을 사용할 수 있는 게 당연하지 않나?”
기침에 섞여 피가 뿜어져 나왔다. 정말 한심한 노릇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존재를 상상해버린 것이냐?
“자네가 앉아있는 자리는 자네에게 어울리지 않아. 양보해 주게.”
철컥, 하고 자동소총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끝인가? 하긴 이런 녀석에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쩐지 편안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응?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총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살짝 눈을 떠봤다. 그러자 한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첫눈에 반해 나도 모르게 뒤쫓아 갔던 그 뒷모습, 10년 만에 만난 나를 학교 안으로 부르던 그 뒷모습.
“비켜주겠나, 아가씨? 나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야.”
대통령의 목소리에 이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킬까 보냐! 나, 나는 현직 교사야!”
송이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송이가 위험한데.
“자세히 보니 무척 아름다운 아가씨로군.”
대통령의 목소리다.
“어떤가, 자네? 내 영부인이 되어볼 생각은 없나?”
“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아, 그렇구나.
저 대통령은 내가 4, 5학년 때 갈망했던 장래희망이다. 당시 내 탐욕의 범주에는 송이 또한 포함되어 있었을 터이다. 줄곧 좋아했으니까. 최악의 전개가 머리 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빨리 일어나야 한다.
“이 나라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야. 고려해볼 여지도 없을 것 같은데?”
대통령이 송이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구역질이 난다. 제발 움직여라, 내 몸아.
“거절이야.”
복도의 적막을 청명한 소리 하나가 깨트렸다. 송이가 대통령의 뺨을 때린 것이다. 대통령은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파악되지 않는 듯,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송이는 그 틈에 뒤로 돌아 내게로 다가오더니.
“빨리 일어나!”
내 멱살을 잡았다.
“네가 저런 녀석보다 약할 리가 없잖아! 저따위 것보다 훨씬 나은 네 꿈이 있을 것 아냐!”
나의 꿈.
나의 꿈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글을 쓰지 않는 작가의 꿈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끝이다, 아가씨.”
대통령이 팔을 한 번 휘저었다. 엄청난 바람과 함께 송이의 몸이 떠올랐다. 곧이어 그녀는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쓰러진 송이에게서 신음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나에게 거역하다니 분수를 모르는군. 그렇다면 이 청년을 죽이고 억지로라도 자네를 손에 넣겠네. 노리개로 삼아 평생 오늘의 무례를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어.”
그 말이 신호였다.
“우선 자네부터 사형이다.”
몸에 힘이 돌아왔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사형은, 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쥐고 있는 연필이 엄청난 열기를 방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뜨겁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 열기는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나의 욕망 하나를 일깨워줬다.
글이 쓰고 싶다.
“건방진 소리를 하는군, 청년. 얌전히 나라의 뜻에 따르게.”
여섯 정의 총구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무섭지 않았다. 여섯 정이 아니라 육백정이라도 상관없다. 나는 천천히 연필을 놀렸다. 그리고 허공에 하나의 단어를 ‘썼다’.
『오발』
여섯 정의 총이 뿜어댄 모든 총알은 모두 내 몸을 빗겨나갔다.
“어떻게… 된 거지?”
가면 뒤의 당황한 얼굴을 상상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이치였어. 너희들을 모두 내가 꿨던 장래희망이야. 내가 만들고, 내가 지배해오던 나의 꿈이지. 그런 너희들이 나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어. 오직 한 가지만 하면 너희들 모두를 제압할 수 있었던 거야. 그래, 그저 ‘쓰기’만 하면!”
글을 쓰지 않는 작가에게 의미가 없다면,
글을 쓰면 되는 것이다.
이것보다 간단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이 나라의 지배자이자, 이 나라 그 자체란 말이다!”
대통령의 등 뒤로 수많은 병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중에 대통령의 진정한 소유물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를 제압하는데 필요한 단어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나는 연필을 눈앞에 들었다. 그리고 대통령도 볼 수 있도록 천천히 ‘썼다’.
『실각』
그와 동시에 대통령의 모든 병기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말도 안돼…!”
나는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섰다. 대통령은 뒷걸음질치려 했지만 자기 힘으로 걸어본 적도 없는 남자였다. 내가 훨씬 빠르다.
“나는 대통령이란 말이다!
“아니, 나는 작가다.”
나는 대통령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대통령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쓰러진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비명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면 안돼! 내 얼굴을 보면 안돼!”
그는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가면은 나의 일격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 모양이었다.
“내 얼굴을 보면 너는 더 이상!”
“괜찮아.”
의외로 침착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보여줘.”
그러자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대통령의 얼굴이 드러났다. 진정으로 추악하고 더러우며, 그리운 얼굴이었다.
“평생 네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저주라도 내리려는 듯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라고 했다.
“지워지면 곤란해지는 것은 나야.”
대통령은 웃었다. 사악함과 지배욕에 가득한, 애처로운 웃음이었다. 그 웃음과 함께 그는 어둠 속에 녹아들어갔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힘이 풀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그 전에 누군가가 내 몸을 부축해줬다.
“괜찮아?”
송이다. 깨어있었나?
“봤어…?”
고개를 끄덕한다. 제길, 정말로 봐버렸군. 뺨이 화끈거리는 바람에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쓰는 것’을 봐버리다니.
“정말 멋있었어!”
웃으며 그렇게 말해준다.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쁘다. 글을 ‘쓰기’ 잘했다.
“나중에 작품을 쓰면 보여줄 거야?”
오한이 몸을 달린다. 내가 쓰는 졸렬한 잡문들을 그녀에게 보여주다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망했다. 완전히 기대하는 눈치다.
“이제 한 명 남았네.”
송이가 시원스레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남은 장래야차는 단 한 명, 6학년뿐이다.
“대통령도 물리쳤는데 그 녀석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단히 끝낼 수 있을 거야.”
아니다.
이제는 나도 알 수 있다. 앞으로 만날 여섯 번째 야차는 지금까지 싸워온 누구보다도 강하고, 어두우며, 그리운 존재였다.
“왜 그래, 영식아?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는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송이와 함께 계단에 올랐다. 나와 조우하기 위해,
우리는 옥상에 나섰다.
옥상에는 어둠이 자리해 있었다.


우리는 옥상에 나섰다.
옥상에는 어둠이 자리해 있었다.
밤하늘의 상쾌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하늘을 대신해 무한히 펼쳐진 허무만이 시야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허무의 한 가운데 한 그림자가 서있었다. 창백한 얼굴을 한 그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요사스러운 밤도 이제 끝자락이다.”
ζ의 문양이 새겨진 가면을 쓴 채, 그림자는 그렇게 말했다.
“밤은 충분히 즐겼는가, 주저앉은 자여?”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군, 6학년.”
나는 연필을 고쳐 쥐며 말했다.
“덕분에 잊고 있던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어.”
“정말로 모든 것을 기억해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요사스러운 밤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6학년은 밤과 닮은 웃음소리를 냈다.
“결국 너는 다시 한 번 네 장래희망들을 짓밟고 여기까지 와버렸다. 이 밤이 끝난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너는 망각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망각할 뿐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다시 이 밤에 초대해줘. 언제든지 환영이야.”
“‘다시’라는 말은 이 밤에 없다. 이 밤은 너의 죄와 함께 시작하여 너의 벌과 함께 끝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벌을 받을 시간이다.”
6학년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역시 그의 무기는….
“연필?”
송이의 목소리다. 하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끝나기 전에는 볼 수 없다.
“다시 한 번, 그 자리에, 주저앉아라.”
6학년이 내게 다가왔다.


6학년의 연필이 내 목덜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간발의 차이로 피하자 내 목 대신 강철 펜스가 찢겨져 나갔다. 연필을 가장한 단검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허공에 글자를 쓰려 했지만 6학년은 그럴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여 왔다. 결국 나는 그의 공격을 피하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이것이 네가 기억해 냈다는 ‘쓰기’인가?”
6학년은 웃음 섞인 말을 흘렸다.
“고작 이런 것 때문에 우리를, 너를 지탱해왔던 모든 꿈들을 포기했단 말인가?”
말을 하면서도 그의 공격은 그칠 줄 몰랐다.
“그렇다면 이 밤이 너의 묘지다.”
6학년의 연필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손에 없다면 대체 어디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등줄기에 격통이 밀려왔다. 날카롭고 뾰족한 무엇인가가 등에 박힌 것이다. 나는 신음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6학년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네가 이길 수 없는지 가르쳐 주겠다.”
6학년은 양팔을 벌렸다. 그러자 허공에 길고 뾰족한 물체가 떠올랐다. 수십, 아니 수백의 연필이었다.
“나 역시 ‘쓰기’이기 때문이다.”
허공에 떠오른 연필들은 각자 제멋대로 글자를 써댔다. 첫 번째 연필이 쓰는 저 글자는 분명히,
『고통』
글자가 완성되는 순간 몸이 뒤로 젖혀졌다. 뼈마디 하나하나를 고통이라는 이름의 벌레가 갉아먹는 듯했다. 흐트러지려는 의식을 간신히 바로세우며, 다음 연필이 쓰는 글자를 살폈다. 그것은 바로,
『질식』
삽시간에 주변의 공기가 증발해 버렸다. 기침을 토할 수도,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다만 진공의 사면에 갇혀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세 번째 연필이 필기를 끝마쳤다. 그야말로,
『죽음』
끝이다. 나는 모든 생기를 잃고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감각이 남아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금씩이지만 몸의 기운도 돌아오고 있었다. 고개를 천천히 들어봤다. 6학년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떠있는 연필들이…
그 중의 하나를 송이가 붙잡고 있었다.
“방해하지 마라, 아가씨.”
6학년이 말한다.
“방해하지 않으면 우리 영식이가 죽잖아!”
송이는 낑낑대며 그렇게 대꾸한다.
“어리석은 여자다. 애초에 너는 내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그만해.
“네가 무엇이건 나와는 상관없어!”
“그렇지 않다.”
그만해!
“나는.”
6학년은 가면을 벗었다.
“나는 너다.”
송이가 송이에게 말했다.


어두웠던 5학년이 끝나고, 6학년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학교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던 나는 그저 의무감에 젖어 등교를 했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내 옆자리에 앉은 그녀 때문이었다.
이송이.
나의 6학년은 단지 그 고유명사 하나로 표현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뭔가를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내 마음을 고백할 용기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연필 한 자루뿐인데 말이다.
오랜 고민 끝에, 결국 연필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냈다. 글을 쓰는 것이다. 그녀의 모습을 관찰하여 완벽하게 글로 옮겨 넣을 수만 있다면, 완전에 가까운 허구로 그녀와의 시간을 묘사할 수 있다면, 나는 그녀를 소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연습장’을 한 권 샀다. 그리고 그곳에 나의 욕망을 적어 넣었다. 그곳에 적힌 그녀는 현실의 그것보다는 부족했지만, 충분히 눈부신 존재였다.
1년은 순식간이었다. 더구나 곧바로 이사를 가게 될 형편이다. 영영 그녀를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겁에 질렸다. 그래서 고백을 준비했다. 지금까지 내가 망상을 기록해왔던 연습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안에 담겨있는 것이야말로 가감 없는 순수한 마음이 담긴 ‘연애편지’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그녀의 책상에 쪽지를 남겼다.
“졸업식이 끝나고 옥상으로 와줘.”
하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무서웠던 것이다. 너무나 무서웠던 것이다.
결국 그 연습장은 내 책상서랍 깊숙한 곳에 봉인되었다. 그리고 10년 동안 누구의 눈길도 받지 못한 채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요사스러운 밤’을.
“저 남자는 네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송이의 얼굴을 한 6학년, 나의 ‘연습장’은 주저앉아있는 나를 가리켰다.
“글로써 너를 완전히 그려내고, 소유하여, 결국에는 자기 자신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송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볼 수 없었다.
“게다가 고백을 하고자 마음먹었음에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도망치고 만 비겁자다.”
그 말대로다. 나는 여전히 주저앉아 있었다.
“결국에는 그 때의 황홀경을 잊지 못해 다른 꿈들을 포기하고, 이제 재주도 없는 ‘쓰기’에 꿈을 바치려 하고 있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남자가 아닌가.”
그녀의 얼굴을 한 채 그런 말을 하지 말아줘.
“저 남자는 나를 이길 수 없다.”
당연히 이길 수 없다.
그녀는 나의 6학년이자, 최초로 내 의지가 동반된 글이며, 내가 사랑하는 소녀였으니까.
“죄 많은 저 남자를 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은 그녀뿐이다.
“요사스러운 밤이 이제 끝난다.”
‘연습장’은 웃었다. 지금까지보다도 훨씬 음습하고, 그리운 웃음소리였다.


딱.
허무가 가득 찬 하늘을 가르고, 하나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도 ‘연습장’도 잠시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인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관찰한 끝에 나는 결국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송이가 연습장의 머리를 쥐어박은 것이다.
“어디서….”
송이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어디서 남의 흉내를 내는 거야!”
연습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어이없는 상황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이리라.
“이봐, 오영식.”
송이가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진짜 이런 게 나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그게….”
“이건 내가 아냐. 자세히 보면 점의 위치도 다르고, 안경테도 다르고, 입매도 다르단 말이야! 게다가!”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가 잔뜩 났지만, 그 외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섞인 표정이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내가 너를 죽이려 들 리 없잖아!”
“어리석은 여자가!”
연습장이 움직였다. 수백 자루의 연필이 송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송이는 개의치 않고 날아오는 연필들을 손으로 쳐냈다. 연습장의 표정은 일그러졌지만 송이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이것도 그저 연필일 뿐이야.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이런 ‘가짜’를 혼내주란 말이야!”
나는 웃었다.
너무나 유쾌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연습장이 나에게 연필을 날렸다.
“오지마라!”
하지만 나는 송이가 그랬던 것처럼, 연필을 손으로 쳐냈다. 그녀의 말이 맞다. 이것은 단순히 연필일 뿐이다. 마음을 전하는 도구이지, 마음 그 자체는 아니다. 나는 연습장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연습장은 겁에 질린 얼굴로 외쳤다.
“오지 말란 말이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껴안았다.
“좋아했어.”
10년 전에 이렇게 했어야 했다. 그 졸업식 날 옥상에서 이렇게 했어야 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진심이야.”
이것이 내가 그토록 쓰고자 했던, 하지만 결국 쓸 수 없었던 ‘연습장’의 결말이었다.
내 품속에서 첫사랑의 소녀를 닮은 연습장이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들리지 않았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나의 연습장이었으니까.
“그래, 너도 졸업 축하해.”
그렇게 한밤중의 졸업식은 끝을 맺었다.


“언제까지 부둥켜안고 있을 거야?”
송이의 핀잔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연습장을 바라봤다. 너덜거리고 있었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나의 첫 번째 허구였다.
“보여줘.”
그 한 마디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무슨 소리야?”
“그 연습장 보여 달란 말이야. 이 시점에 와서 보여줄 수 없다고 발뺌하지는 않겠지? 나야말로 그 연습장의 정당한 독자니까 말이야.”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나는 반강제로 연습장을 송이에게 건네주고 말았다. 연습장을 받아든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물어왔다.
“베드신도 있어?”
초등학생이 쓴 글이다!
그녀는 안심한 표정으로 사뭇 진지하게 내가 쓴 졸렬한 문장들을 읽어내려 갔다. 그리고 마침내 연습장을 덮고 짤막한 독후감을 발표했다.
“엉터리.”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아무리 예전에 쓴 글이라도 이렇게 무자비하게 짓밟히면 작가는 상처 입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한 마디에 움츠려 있던 내 어깨가 펴졌다.
“퇴고해.”
뭐?
“퇴고하란 말이야. 지금이라면 훨씬 더 잘 쓸 수 있잖아?”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지금의 날 모델로 쓰면 되잖아. 현직 여교사와 음침한 작가의 연애소설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을 나를 보며 그녀는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졸업식 날 널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그 때의 빚은 이자까지 쳐서 돌려받을 거야.”
잠깐, 지금 그 말뜻은 설마.
“잊어버렸어? 나는 6학년 때 전교회장 겸 학급반장이었단 말이야. 반 아이들 글씨체 정도는 대충 알고 있었어. 게다가 네 글씨체는 너무 특이해서 금방 눈에 띄었고 말이야. 비밀스럽게 하려거든 필적위조쯤은 했어야지.”
온 몸의 기운이 빠져나간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자, 이제 그만 일어나. 집에 돌아가셔서 써야할 글이 있잖아, 작가 선생님?”
내 팔을 잡아당기며 송이가 말했다. 맞는 이야기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손가락이 있고, 연필이 있는데 못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송이야.”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안아 봐도 될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주먹이 내 이마를 강타했다. 하지만 나는 아픔을 애써 참으며 그녀를 와락 안아버렸다. 송이는 잠시 버둥거렸지만 끝내 포기한 듯,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줬다. 기분 좋은 중압감이었다.


쓰고 싶은 글은 많았지만, 처음 써야할 글은 정해져 있었다.
연애편지다.
편지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고상한 의사소통 수단이니까.

      
2007. 02. 14
                                                                                                Ot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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