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그림이요? 전 그림이 아니에요!"
"그럼 넌 도대체 뭐야!"
당황한 정도가 지나치고 상대도 나름 우호적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을까. 엘란츠는 놀란 얼굴 그대로 자신이 보고 있는 걸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는..."
아루잔이 눈을 조용히 감고 말을 끊었다. 그리고 화면에 비친 그녀의 눈이 열렸을 때, 그 색은 밝은 푸른색에서 더 진하고 깊은 진청색으로 변했고, 심한 진동과 함께 밖에서 들었던 소리와 비슷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우우웅-...
하지만, 높낮이는 같지 않았다. 더욱 깊고 어둡고 묵직한 소리였다.
엘란츠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뒤로 주저앉았고, 빛나는 하얀 종이는 그대로 그의 얼굴 가까이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다가왔다.
다시 그녀의 눈동자 색이 이전의 색으로 변한 후, 입이 열렸다.
"전략적 만능 기밀 우주 전함 대 전쟁 병기 아루잔"
이제까지와 다르게 차분한 말투의 말을 마친 아루잔의 작은 입술이 다시 닫혔다가 열린다.
"이랍니다!"
무엇이 좋은 건지 다시 그림이 아니면 표현이 힘들 수준의 웃는 얼굴을 내비치며 활기차게 외쳤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엘란츠는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지식에는 [전략적], [기밀], [전함] 같은 것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알아들은 말은 [만능 우주 대 전쟁 병기] 뿐이었고, 그마저도 귀에 제대로 담아두지 못하고 흘려버렸다.
그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지만 아루잔은 그런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사용자! 이름을 알려주세요! 만약 알려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말똥이..."
"엘란츠."
"네?"
"내 이름은 엘란츠."
"혹시, 탐정이신가요!?"
아루잔의 말에는 엘란츠가 모르는 것이 많았다.
'탐정이 뭐지?'
그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기에는 탐정이라는 건 전혀 필요가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거기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읽어낸 아루잔은 시무룩한 얼굴을 보여주며 말했다.
"아니시군요... 그래요. 우주 탐정이라는 건 말도 안되는 직업이니까요. 그런데 기동 과정에서 넘어지실 줄이야. 괜찮으신가요?"
"잠깐, 잠깐만...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기가 힘들어. 난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한숨을 쉬는 얼굴, 고개를 흔드는 얼굴, 그리고 다시 눈을 밝게 뜨고 힘찬 모습으로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아루잔.
"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퀀스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보 수집을 위해 사용자의 역사 내역을 요구하겠습니다!"
여전히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엘란츠, 그러거나 말거나 아루잔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질문, 엘란츠 님께서는 자신의 나이를 알고 있습니까?"
"잘... 모르겠..."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아루잔의 말이 이어진다.
"질문, 엘란츠 님께서는..."
꼬르륵. 꼬륵. 꼬르륵.
엘란츠의 배에서 크게 소리가 났다. 그러자 아루잔은 하던 말을 멈추고 커진 눈과 동그랗게 벌린 입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차! 상태 보존을 위한 처치를 실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머리 위로 무엇인가 떨어졌다. 떨어진 것은 작고 가벼운 물건이었고, 엘란츠의 위에서 굴러내려 푸른 선의 빛을 통해 어떤 물건인지 볼 수 있게 되었다.
길쭉한 원형을 이룬 가벼운 물건. 캡슐이라 부르는 물건이었다.
"이건... 약?"
이번에는 엘란츠 역시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종종 먹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상태 보존제입니다! 지금 즉시 복용하지 않으면 사용자는 빠른 시간 안에 사망할 수 있으니 이 점에 유의하여 올바른 판단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망이라는 말에 엘란츠의 표정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 그렇다고 뭐가 뭔지 모를 존재가 주는 것을 무턱대고 먹을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는 아루잔이 상태 보존제라 부른 물건을 손에 쥐고 바라보았다. 빛 때문인지 그의 눈에는 푸른색을 지닌 알약으로 보였다.
'이걸 먹어도 될까?'
하지만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엘란츠는 눈 딱 감고 먹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의 어머니가 약을 먹고 죽진 않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였다.
그가 입 안으로 약을 넘기는 모습을 본 아루잔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저를 믿고 드셨네요. 안심하세요. 그거 빨간약이니까요."
본래의 색이 빨간 것이라고 알려주는 아루잔이지만, 그런 건 엘란츠에게 상관없었다. 만약 파란색이라고 했어도 상관하지 않았을 테니까.
목을 지나 몸 속으로 지나간 약은 자신의 역할을 하기 위해 빠르게 분해되었다. 보통의 약과 성질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 덕에 즉각 효과가 나타났다.
엘란츠의 굶주림이 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어...?'
약을 먹기 전만 해도 이 어느 무엇 하나 알 수 없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소리를 처절하게 낼 정도의 굶주림은 마법처럼 사라진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엘란츠는 아루잔을 보며 말했다. 비록 그녀를 향해 한 말이 아닌 혼잣말이었지만, 아루잔은 거기에 밝게 대답해주었다.
"영양이란 영양은 전부다 압축되어 있답니다. 생물의 보존에는 최고에요!"
"그럴 수가..."
믿을 수 없는 일의 연속, 엘란츠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아루잔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존경의 눈빛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아루잔은 그의 표정을 읽어낸 후, 부끄러운듯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상기된 볼과 왼쪽 밑으로 내려보는 수줍은 모습이다.
"아이 그런 눈으로 쳐다보셔도... 효과는 길어지지 않는 답니다. 기껏해야 일주일이니까요."
"일주일?"
이번에도 엘란츠는 시간을 계산하는 개념이 없었기에 이해하지 못해서 되물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루잔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끝냈다.
때문에, 엘란츠는 그게 무슨 말인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 순간에 아루잔이 먼저 말을 꺼내는 바람에 미처 물어보지 못했다.
"그러면 질문! 엘란츠 님께서는 태어나서 제 안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저에게 전부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녀의 질문에 엘란츠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으며 말했다.
"전부는 아니지만 기억나는 것들은 모두 말해줄 수 있을 거 같아."
굶주림을 벗어나게 해주었기 때문일까. 결국 엘란츠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루잔을 믿기로 결정했다. 그런 그의 대답에 아루잔 역시 기쁜 얼굴을 보여주며 활기차게 말했다.
"네! 그러면 말해주세요. 즉시 데이터 작성을 시작하겠습니다."
'데이터 작성이 뭔지 모르겠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엘란츠가 이야기의 시작을 고민하는 동안 아루잔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다양하게 웃는 표정을 보여주며 기다렸다.
"어머니께서 내게 해주셨던 이야기가 있어. 항상 내게 축복 받은 아이라고 하시면서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을 말해주셨는데 그 이야기부터 해볼게."
순간적으로 아루잔의 눈동자 속에 초록색 선이 가로로 그어진 후 빠르게 깜빡였다. 그 후 말없이 힘차게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일 거야."
"무엇 때문이죠?"
"전쟁이야. 핵이라고 하는 무서운 무기를 사용했다고 해. 그래서 지금처럼 됐다고 하셨어. 살아있는 것들이 보기 힘들고 마실 물을 구하기가 힘들어. 그나마 운이 좋아서 살아있던 사람들은 방사능이라는 것 때문에 죽었다고 하셨어."
아루잔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눈을 대신해서 물음표가 그려진 재미있는 얼굴.
"그런데 왜 축복이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이런 세상에서는 새 생명이 태어나기 힘들다고 하셨거든. 만약 태어난다고 해도 정상적인 모습이 아닐 거라고 하셨어."
"지금 그 분은 어디 계신가요?"
엘란츠는 고개를 느리게 가로 저은 후 이미 자신의 손으로 땅에 묻었다는 것을 말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슬픔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가 일어났을 때의 메마른 눈물처럼 그저 메마른 감정을 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루잔은 펑펑 우는 얼굴을 보여주며 격하게 반응했다.
"어떻게 그런 슬픈 일이! 너무 안타까워요."
엘란츠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괜찮아. 오래 된 일이야. 난 내가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생각해. 앞으로도 난 사람을 먹지 않을 거니까."
그는 아루잔의 슬픈 일이라는 말을 다른 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 그가 살고 있는 시대는 그런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땅에 고이 묻는 선택을 한 것이다.
올바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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