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문득 엘란츠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날 붙잡았던 자들은 어떻게 된 거지?"
조용히 웃는 얼굴로 엘란츠의 이야기를 듣던 아루잔은 그 말을 듣고 빛을 잃은 눈으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그...그거. 인간이었나요?"
"어... 그렇지?"
'짐승 같은 놈들이었지만.'
"제가 깔고 뭉갠 것이 인간이었다니, 이럴 순 없어요. 아아... 저는 무슨 짓을..."
상당히 동요하는 아루잔을 본 엘란츠는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괜찮아. 그래도 그들은 날 해치려고 했으니까."
아루잔은 들리지 않는 듯 심하게 요동쳤다. 빛나는 종이 안의 얼굴 뿐만 아니라, 종이 자체가 심하게 흔들린다. 그리고,
주위에 환한 빛이 들어왔다. 처음 보는 내부의 모습, 하지만 엘란츠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공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하얀 빛은 곧바로 색을 바꿔 붉은 색으로 바뀌고 그 순간 상당히 시끄러운 소리가 그의 고막을 찔렀다.
삐──────! 위이이잉─!
다시 하얀 빛, 붉은 빛, 하얀, 붉은, 하,붉... 점등이 반복되었고 시끄러운 소리는 그칠줄 몰랐다. 그러는 중에 아루잔의 얼굴은 종이에서 사라지고 그 대신 붉은색 숫자만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99.5, 98.6, 97.3, 96.8….
이어서 커다란 진동과 쿵. 하고 요란한 소리가 엘란츠의 균형을 무너지게 한다. 숫자는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92.7, 91.9….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슈우우우욱───
거인의 숨소리와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들었던 것이라 생각한 엘란츠는 곰곰히 생각했다. 그 소리는 처음 이 정체 모를 물체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난 소리와 비슷했다.
숫자가 90이 되는 순간, 아루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폭을 실시합니다."
"잠깐만! 그게 뭔데!?"
그게 뭐냐고 묻는 엘란츠의 말에 줄어들고 있는 숫자가 잠시 사라지고 아루잔의 얼굴이 나온다. 다급한 얼굴이다.
"자폭이에요! 터질 거에요!"
"터진다고? 폭탄처럼?"
"그래요! 그러니까 도망가세요!"
아루잔이 말하는 동안에도 얼굴과 숫자가 번갈아가며 표시되었다.
'도대체 왜?'
87.5, 86.7….
"왜?"
"저는 저질러선 안되는 행동을 저질러버렸어요. 지구로 오자마자 인간을 죽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아까는 전쟁 어쩌구 병기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여기로 보내진 건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인간을 찾게 된다면 절대 죽이지 말라고 프로그래밍 되어있단 말이에요!"
프로그래밍. 엘란츠가 빌게이츠란 이름이 언급되었던 책에서 본 적 있던 단어였다.
"잠깐만 어차피 그자들은 짐승이나 다름없었어. 네가 없었으면 난 지금쯤 끔찍한 꼴을 당하고 죽었을 거야. 인간도 아닌 짐승을 위해서 터질 필요는 없어!"
"네?"
숫자가 사라지고 아루잔의 대충 그려진 멍한 얼굴만이 대신 나타났다.
"그들은 같은 인간을 잡아먹는 짐승들이야. 그리고 여기 있는 나도 엄연히 인간인데 터져버린다면 그땐 정말로 인간을 죽이는 거잖아."
"아, 뭐. 그렇네요..."
더 이상 붉은 빛과 하얀 빛의 점등도 이어지지 않았고, 이전처럼 다시 어두워진 채 시끄럽게 울리던 소리도 사라졌다.
둘 사이에 아무 말도 없이 조용해졌다.
먼저 다시 말을 연 것은 엘란츠였다.
"그러니까, 정말로 네가 이... 전체라는 거지?"
"네. 제 이름은 아루잔, 전략적 만능 기밀 우주 전함 대 전쟁 병기입니다!"
다시 원래의 그림체로 돌아와 활기차게 외치는 아루잔.
"하늘에서 떨어진 거 맞지?"
"우주에서 지구로 불시착 착륙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고가 있었지만..."
곧바로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말을 흐렸다.
"네... 맞아요."
"왜?"
"더 이상 지구에는 생명체가 남아있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찾지 않을 고향으로 보내졌습니다. 만약 인간이 있다면 최대한 보호하고 도울 것을 프로그래밍 되어졌습니다."
엘란츠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전쟁 병기라고 했는데 인간을 보호하고 돕는다는 거지?'
"전쟁 병기라고 하는 건 무기라는 말이지?"
"네."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지?"
"우주의 종말을 위해 만들어졌답니다! 하지만, 도중에 계획이 바뀌어서 저는 영영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단 하나 있는 예외를 제외한다면 저는 이곳에서 폐기될 예정이었습니다."
"예외?"
아루잔은 활짝 웃었다.
"인간을 만나는 것입니다!"
"널 만든 건... 인간이야?"
믿을 수 없었기에 무심코 내뱉은 질문은 인간 외의 지적인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엘란츠에게 심어주었다. 그것은 발전이기도 했다.
하지만,
"네."
아루잔은 인간이 만들었다고 대답했다.
"하늘 밖... 네가 말하는 우주에는 다른 인간이 살고 있는 거야?"
"네."
엘란츠는 믿기지 않았다. 이제까지 살아있는 인간은 몇 안된다고 생각했고 그마저도 제대로 된 인간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이건... 아니지, 너는 다시 우주라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거야?"
"당연하죠! 저는 그러기 위해서 만들어졌어요!"
"아까는 우주의 종말이라고..."
"지금은 지구에 있는 엘란츠 님의 보호와 동시에 원하고자 하는 것을 돕는 것이 목적이 되었답니다!"
"아루잔."
엘란츠가 처음으로 아루잔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두 눈은 면을 이루는 선이 안쪽으로 기울어진 두 개의 마름모꼴이 되어 반짝거렸다.
"네!"
"우리 집으로 가줘."
"네!"
힘찬 아루잔의 대답과 함께 진동이 시작되었다. 엘란츠는 다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은 채로 진동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또 넘어질 거라면 앉아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진동이 멈춘 후, 아루잔의 눈이 작은 점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우리 집이 어디인가요?"
"오..."
'그렇지 참.'
아루잔이 엘란츠의 집이 어디인지 알 리가 없었다.
"오...? 무엇인가요?"
"아니, 생각해보니 나도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어."
엘란츠가 불한당들에게 잡혔을 때 이미 기절을 한 상태였기에 더 이상 그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집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면~ 밖으로 나가서 찾아보기로 할까요?"
"밖? 아니, 여기에서 나간다고 해도 난 찾을 수 없을 거야."
"제가 찾아보도록 할게요!"
'무슨 말이지?'
엘란츠가 말하는 밖과 아루잔이 말하는 밖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말한 밖은 전함 아루잔의 밖을 말한 것이지만, 그녀가 말한 밖은 우주를 뜻한 것이었다.
"혹시 이렇게 생겼나요?"
아루잔의 얼굴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건물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주 정밀하게 그려진 모습, 사진이라고 해도 좋을 수준으로 보인다.
하지만 엘란츠의 집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 상태가 좋았다. 조금 더 높고 모래에 파묻힌 곳이 없어 보이는 모습, 누군가 살고 있는 듯, 어둠 속 가운데에 밝게 빛이 들어온 모습까지.
'...어두워? 아, 그렇지. 아루잔을 별이라고 생각했었지. 지금은 밤이었구나.'
"우리 집이 아니야."
'누군가 살고 있겠지. 그래도 기대하지 말자.'
"그러면 이렇게 생겼나요?"
이번에도 엘란츠의 집은 아니었다. 비슷하게 보이긴 했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철로 만든 지붕의 판자, 그 위에 전기를 얻기 위한 태양열 판까지도 이번에도 빛이 어둠을 밝히고 있기까지. 그 속에서 작은 사람이 나와서 팔을 들어 올려 자신의 머리 가까이 가로막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뭐 하는 거지?"
"눈부셔서 그런 거 같아요."
이루잔의 말이 끝나고 사람의 모습이 확대되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더 자세하게 나타났다. 상당한 근육질의 남자가 눈을 찡그린 채 내리쬐는 빛을 손으로 막고 있는 모습이었다.
엘란츠는 그가 사람을 잡아먹는 인간이라 판단했다. 그렇지 않고는 그런 근육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내리쬐는 빛의 정체까지 알아내진 못했다.
"빛이 어디서 나오는 거야?"
"네? 전데요!"
'어? 아... 자동차도 빛을 내긴 하지.......'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엘란츠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졌다.
"아까 그 집이랑 이 집은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그거야 당연히... 이렇게..."
아루잔의 내부에 하얀 빛이 들어온다.
텅 빈 공간에 앉아있던 엘란츠, 하지만 이후 찾아오는 변화에 그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사라지는 것처럼 투명해지더니 허공에 앉아있는 모양새가 되어버린 것이다. 때문에 터무니 없이 놀란 엘란츠는 소리를 으악하고 크게 내질렀다.
"세상에 맙소사! 내가 떠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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