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엘란츠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방금 전까지 있던 장소에서 떠났다는 것이다.
"여기가 어디지?"
"말씀하신 대로 지구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아루잔이 웃는 얼굴을 비추었다.
"그럼 저기 저거는..."
엘란츠는 황토색과 검은색, 붉은색으로 이뤄진 원형의 덩어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구입니다!"
"저게 지구... 그러니까 내가 있던 곳?"
"그렇습니다!"
'세상에.'
지금 이 순간 엘란츠는 꼭 해야 할 말이 떠올랐다. 이제까지 단 한번도 쓰지 않았던, 금지되었던 말이다. 어머니가 자신의 앞에서 실수로 썼던 이후로 들을 수도 할 수도 없던 말이었다. 그것은 지구를 직접 본 심정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이 순간 만큼은 아루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멍하니 지구를 바라보던 엘란츠가 다시 움직일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번에도 역시 뒤통수에 있던 상처의 고통이 원인이었다.
'으... 얼마나 다친 거지?'
한 손을 자신의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만져보는 엘란츠, 그의 푸석푸석한 갈색 머리카락이 새어 나온 피와 뭉쳐 얼마나 어떻게 다쳤는지 손으로도 확인하기 힘들었다. 그저 조금씩 짚어보며 통증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나갔다.
그럴 때마다 인상을 찌푸렸고, 아루잔은 엘란츠의 표정을 읽어낸 후, 말했다.
"불편하신 곳이 있으신가요?"
"머리를 다친 거 같은데 얼마나 다쳤는지 모르겠어서..."
"사용자 엘란츠 님의 상태 확인을 위한 시스템을 작동 시키겠습니다."
아루잔의 눈이 붉게 빛난 후, 엘란츠의 몸 주위로 붉은 빛을 띄운 여러 개의 선이 빠르게 움직인다. 그의 몸을 수많은 붉은 선이 위 아래로 일렁이며 움직이고 엘란츠는 그러한 선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손으로 잡아보려는 시도를 했지만, 잡을 수 없었다.
다시, 아루잔의 눈이 푸른색으로 변하고 그의 몸을 감쌌던 선들도 사라졌다.
"두 가지의 중대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입을 꾹 다물고 마치 화가 난 것 같은 얼굴로 변한 아루잔. 엘란츠는 중대한 사실이라는 말에 조금 긴장했다.
"어떤?"
"사용자 엘란츠 님께서는 앞으로 남은 수명이 약 60년 밖에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루잔의 말이 마친 후 엘란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아루잔은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멍청한 눈으로 아루잔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그가 꺼낸 말은
"나머지 하나는 뭔데?"
비교적 맑은 목소리로 다른 중대한 사실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루잔의 얼굴은 머리 위에 느낌표와 함께 검고 굵은 점으로 된 눈과 크게 벌린 입으로 소리 높여 말했다.
"중대한 사실을 그렇게 넘어가시나요!"
"그렇게 말해도 난 그게 뭔지 잘 모르겠는데..."
그랬다. 애초에 날짜 개념이 없었기에 자신의 남은 수명이 몇 년이라고 해도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것이다.
"얼마 살지 못한단 거에요!"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남은 수명이 60년이라는 건 나름대로 긴 시간이다.
"그렇구나... 역시 이런 상처로는 오래 살 수 없겠지. 그래서 다른 하나는 뭐야?"
"수명을 늘리기 위한 장치가 없으므로 이를 위해 죽음의 보호로 갈 것을 권합니다!"
죽음의 보호, 아루잔은 그렇게 말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는 물론, 주인공인 엘란츠를 포함해서 이게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다만, 갈 것이라는 말이 있으니 장소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도대체 내 뒤통수는 어떻다는 거지?'
엘란츠는 다시 한번 자신의 뒤통수를 손으로 짚어보았다. 그로 인해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어?'
놀란 눈을 한 엘란츠에게 아루잔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사용자 엘란츠 님의 생체 상태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세팅을 완료했습니다. 앞으로도 언제든지 최상의 컨디션이 필요하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아루잔의 말대로 엘란츠의 뒤통수는 물론, 모래 한 톨에 상처를 입었던 볼의 상처와 알게 모르게 그가 가지고 있던 잔병까지도 말끔하게 치료 되어 지금의 그는 적어도 신체의 상태에 있어서 최상의 컨디션을 가지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다만, 그는 여전히 지난 세월 동안 한번 없이 깎은 적 없이 계속해서 자란 덥수룩한 수염을 지녔고 피와 땀, 모래와 몸에서 나오는 기름으로 인해 지저분하고 긴 머리카락에 씻지 못해 굳어버린 온몸의 때와 그런 그의 몸에 걸치고 있는 낡아 빠진 천까지.
"...라고 말씀드렸지만 아직 더 필요한 게 있겠네요."
"맞아. 물이 있었으면 좋겠어."
엘란츠는 갈증을 느꼈기에 무심코 아루잔의 말에 그러한 대답을 했다. 그것 역시 엘란츠의 입장에서는 아주 커다란 소원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마음껏 물을 마실 수는 없겠지?'
"그러면, 클래식으로 준비하겠습니다!"
클래식. 고전 방식을 의미한 것이다. 이렇다는 말은 현대식이 존재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엘란츠는 클래식이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준비한다는 말은 알아들었다.
그러나 그가 기뻐하기 전에 우주 공간이 보이던 바닥이 정말로 뻥 뚫려서 엘란츠가 그 밑으로 빠지게 되었다.
"으─── 아── 아─!"
검은 바탕의 우주와 황폐화 된 지구, 여전히 빛을 내는 별들을 배경으로 엘란츠는 떨어지듯 미끄러져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너무나 빠른 속도에 엘란츠는 자신을 밖으로 내던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우주가 어떤 공간인지도 모르는 그에게 미지의 세계인 그곳은 공포 그 자체였다.
마침내 떨어진 곳은 다행스럽게도 우주가 아닌 깨끗한 물로 가득 차있는 신비한 푸른 조명이 비추고 있는 공간이었지만 말이다.
풍덩─.
물론, 그곳에도 아루잔의 얼굴이 나올 빛나는 하얀 종이는 존재했다.
"어서 오세요!"
이미 물에 목까지 잠긴 엘란츠는 아루잔의 얼굴을 본 후, 밑으로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몸을 봤다.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입고 있던 옷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의 여러 겹의 낡은 천은 어디로 갔는지 이미 사라져 무엇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존재였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체온과 비슷한 수준의 물.
그리고 그 물을 머리를 쳐 박고 허겁지겁 마시는 엘란츠였다.
"저... 저기,"
"컥."
"그 물은 마시는 물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늦었다. 그는 입 안 가득 쓴 맛과 동시에 맵고도 따끔따끔한 느낌을 받았다. 일반적인 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놀라기는 아루잔도 마찬가지였지만, 엘란츠는 어찌할 줄 모르고 입 안에 있는 이상한 느낌을 없애기 위해 혀를 이리저리 굴려보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심해지고 이에 닿을 때마다 뽀드득 뽀도독 하는 마찰 소리까지 났다.
"고개를 위로 들어주세요!"
아루잔의 말에 괴로워하던 엘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물이 쏟아져 나왔다.
차가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으어업── 컥───!"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고, 코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입을 벌려서 자신을 괴롭게 만들던 것을 씻어냄과 동시에 마셔서 갈증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후에 물이 떨어지는 곳으로부터 멀어져 얼굴을 씻어내며 점점 차가워져 가는 물의 온도에 크게 외쳤다.
"차가워! 이제 그만!"
"아, 네! 알겠습니다!"
쏟아지던 물이 그치고, 엘란츠는 지친 표정으로 몸을 조금씩 떨며 아루잔을 바라보았다.
"어... 음, 고마워."
"아하하... 하하... 괜찮으신가요?"
"응. 그래. 아마도."
모든 난리가 끝나고 난 후 그제서야 제대로 물을 본 엘란츠는 평범한 물이 아님을 깨달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물보다 더 미끄럽기도 했고, 투명하게 비추지도 않는 물은 조명에 의해서 맑은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이 물은 뭐야?"
엘란츠는 두 손으로 물을 떠 보이며 말했다.
"세척액입니다!"
"세척액? 물이 아닌 거야?"
"네, 마셔도 크게 해롭지 않지만, 되도록 마시는 걸 자제해주세요. 일설에 따르면 꾸준히 마시게 될 경우 중독되어 세척제를 마시지 못하면 불안해 하는 증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아니... 별로... 그럴 마음은 들지 않는데...'
"그런데 내 옷은..."
"네, 사용자 엘란츠 님의 최적 온도에 내부 온도를 맞췄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판단, 소각하였습니다!"
"소각?"
"네! 태워서 없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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