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하늘을 봤을 때 보이는 것은 하얀 구름 같은 것으로 뒤덮인 모습이었는데 도무지 빛이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밝지만, 빛이 오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궁금한 건 전부 물어봐도 되는 거지?"
엘란츠의 말에 알란이 주위를 살핀 후 대답했다.
"네, 그렇긴 한데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는 삼가 하시고 지금처럼 주위에 보는 이가 없을 때 해주셔야 할 겁니다. 아무래도 수상한 자가 있다고 알려지면 골치가 아프거든요."
"빛은 어디에서 나오지?"
"그거야 당연히 신성한 대기의 흐름에 따른 것이죠. 만약 어둠이 어디서 오느냐고 물으실까 염려되어 미리 답해드리자면, 빛의 흐름이 끝나는 지점에는 항상 어둠이 따르기 마련이지요."
알란은 되도록 엘란츠가 이해할 수 있도록 그 나름대로 상세하게 말해주었지만, 여전히 엘란츠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아는 빛은 태양, 즉 해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걸 상세하게 알 필요는 없었기에 더 이상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탑 주위에는 이렇다 할 건물이 없이 평평한 돌로 이어진 길과 무너져 내려 그대로 방치된 탑의 일부와 주위를 감싼 돌벽 뿐이었는데, 돌벽은 탑의 절반 정도 되는 크기에 정교하지 않고 투박한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도둑 정도는 막아줄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밝기 때문에 탑에 순찰 온 병사는 없었다.
알란을 따라 밖으로, 주위를 감싼 새파란 나뭇잎이 가득 피어있는 커다란 나무들을 지나,(초록 잎이 푸르기에 파랗다고 한 것이 아니다. 정말 파란색이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하얀색 벽이 길게 세워진 모습이 엘란츠의 눈에 들어왔다.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주위에 파란 나무가 가득 있다는 것도, 바닥의 평평한 돌 외에도 초록빛 풀들이 자라있는 모습도 이전에 자신이 있던 곳에서는 꿈에서도 보지 못한 풍경이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랬기 때문에, 엘란츠의 눈가에 짠물이 고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멈췄다. 흘리는 일은 없었다.
걷고 걸어 벽 앞, 열려 있는 문 앞에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무장을 머리에서 발 끝까지 지닌 병사가 아홉 명이다. 대부분의 병사는 둥글고 투박한 투구와 아무런 문양 없는 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 중 하나는 다른 병사들과 달리 붉은색 망토를 두르고 있는데, 다른 병사들과 달리 투구 생김새가 더 날카로워 눈에 띄었다.
"여. 쓸데없는 것을 떠드는 자의 제자, 알란."
붉은 망토를 두른 병사가 알란과 엘란츠의 앞으로 다가왔다.
"열을 거느리는 자, 드렉."
알란은 드렉이라고 부른 병사에게 손을 내밀었고, 드렉 역시 손을 내밀어 둘은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어 악수를 했다.
"이번엔 또 무슨 심부름이야?"
"말하자면 좀 길어. 간단하게 말하면 무기를 사러 가는 길이야."
"무기? 옆에 있는 이는 새로운 제자야? 차림새를 봐선 아닌 거 같은데."
드렉은 엘란츠를 위 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선생님의 손님이셔, 외딴 곳에서 오셨다는 모양이야. 엘란츠 님. 여기는 제 친구인 드렉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엘란츠 님이시고..."
"뭐, 예언자의 손님이라면 수상한 자는 아니겠지."
드렉은 엘란츠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한 후, 다시 알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또 네가 오는 걸 보니 여전히 예언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구나."
"그렇지도 않아. 다른 분들은 여전히 선생님이 내려주신 과제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으니까."
"그게 독차지 하고 있다는 거지."
알란은 웃고 있는 드렉에게 손사래 쳤다. 하지만 알란 역시 속으로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됐어. 그보다 수상한 자는 없었어?"
"뭐, 늘 그렇잖아. 감히 하늘 아래 스투피두드의 왕이자 모든 이의 왕이 자리 잡은 이 땅에 수상한 녀석이 올 생각을 할 수 있겠어?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 왜? 뭐 들은 거라도 있어?"
드렉에게는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은 모양인지,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는 건지 그도 수상한 자는 보지 못했다는 말 외에는 현재 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생각도 못한 듯한 말을 했다.
'그런 걸 들고 다녔는데 이상하게 보지 않았던 건가?'
엘란츠는 드렉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분명 제레먼이 괴상한 생선을 들고 다녔을 텐데도 드렉은 왜 궁금해 하지 않는 걸까.
"그래. 아무튼 난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 너무 늦어지면 선생님께서 내가 멀리 도망이라도 갔다고 생각하실지도 몰라."
"알았어. 들어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드렉과 알란, 그러다 드렉은 무엇이 떠올랐는지 뒤돌아 다시 알란을 불러 세웠다.
"참, 잊고 있었는데 무기는 뭐에 쓰게?"
"선생님께서 급하게 왕의 일로 조사할 일이 생기셨는데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사오라고 하셨어."
그 말을 들은 드렉은 곧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야! 농담이겠지."
"진짜야. 내가 왜 그런 농담을 하겠어."
"오~ 새로운 신탁을 받았다! 무기, 무기가 필요하겠어~ 내 몸을 지켜줄 거야~ 다가오는 사악한 자들을 베어줄 거야~"
드렉은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며 제레먼의 흉내를 냈다. 그의 과장된 몸짓에 주위 병사들까지도 작게 웃음소리를 내었고, 알란은 그 행동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관둬. 전혀 그런 적 없으셨어."
"미안, 그래도 그렇지. 우리는 뭐가 되는 거냐."
드렉 역시 이유가 있어 한 행동이었다. 자신들을 믿지 못하는 제레먼을 우스꽝스럽게 놀린 것이다. 알란은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불러 놓고 확실하지 않으면 헛걸음만 하는 거라 그런 게 아닐까 싶어."
"우리가 게으르다고 생각한 건 아니고?"
알란은 생각 이상으로 예리한 드렉의 말에 놀랐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게으르면 탑까지 굳이 순찰을 오겠어? 그렇게 생각하시진 않으실 거야. 나도 그렇고,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해."
드렉은 어깨를 으쓱하며 좋아하는 티를 냈다. 알란의 대처는 현명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꼭 날 찾아와. 적어도 늦기 전에 말이야."
"그렇게 할게."
드렉은 더 이상 알란을 붙잡아두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친구를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이유 모를 불안감이 생겨났다. 언젠가 그가 그의 친구를 잃을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었다.
밖에선 보이지 않던 수많은 건물들, 대부분 나무와 돌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건물들이다. 바닥 역시 이전에 걸어온 길과 같이 평평한 돌로 포장되어있다.
"잘하셨습니다."
병사들과 거리가 멀어지자마자 알란이 엘란츠에게 말했다. 정작 엘란츠는 무엇이 잘했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말없이 있어주셔서요."
"별로 할 말도 없었으니까."
알란은 웃으며 한걸음 앞장섰다. 걸음걸이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엘란츠가 주위를 둘러보며 걷기에 충분한 속도다. 아무래도 그가 둘러볼 것이라 예상한 알란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것은 제레먼의 뜻이기도 했다.
큰 규모의 공간에 다양한 크기의 건물들과 그 사이로 각양각색의 복장을 하고 있는 이들이 다니는 모습이 특히 엘란츠의 눈에는 신기하게 비춰졌다. 남자, 여자, 땅에 네 발로 돌아다니는 동물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시끌벅적해지고 그만큼 돌아다니는 이들의 수도 많아졌다. 서로 물건을 주고 받으며 소리를 높이고, 중간 중간에는 병사들이 돌아다니며 주위를 살펴보기도 했다.
"절 놓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알았어."
알란과 엘란츠는 사람이 몰려있는 곳을 천천히 빠져나간다. 그러다가 다른 이들과 몸을 맞대고 지나가기도 하고, 그럴 때면 여러가지 냄새를 맡을 수 있기도 했다. 대부분은 좋지 않은 냄새들이었지만 엘란츠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을 빠져나온 후에도 알란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 걸어갔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전에 있던 곳과 달리 인적이 드물다 못해 아예 이쪽으로 오는 이가 없는 외진 곳까지 걸었다. 그러자,
멀리서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요. 바로 앞입니다."
엘란츠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탕─── 탕── 탕─
쇳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지붕의 굴뚝, 그 밑으로 안이 훤히 보이도록 개방된 장소에 어떤 남자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 뒤로는 제대로 사방이 벽으로 막힌 나무 집이 붙어있다시피 하다.
그는 알란과 엘란츠가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열심히 모루 위에 망치질을 해서 불똥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가 진짜로 불똥 그 자체를 만들기 위해 망치질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잡담 | 1678명이 읽었어요. 3.16.67.13
